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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의 즐거움/오려두는 글23

[시] 고요로의 초대 - 조정권 고요로의 초대 조정권 잔디는 그냥 밟고 마당으로 들어오세요 열쇠는 현관문 손잡이 위쪽 담쟁이넝쿨로 덮인 돌벽 틈새를 더듬어 보시구요 키를 꽂기 전 조그맣게 노크하셔야 합니다 적막이 옷매무새라도 고치고 마중 나올 수 있게 대접할 만한 건 없지만 벽난로 옆을 보면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은 장작이 보일 거예요 그 옆에는 낡았지만 아주 오래된 흔들의자 찬장에는 옛 그리그 문양 새겨진 그릇들 달빛과 모기와 먼지들이 소찬을 벌인 지도 오래되었답니다 방마다 문을, 커튼을, 창을 활짝 열어젖히고 쉬세요 쉬세요 쉬세요 이 집에서는 바람에 날려 온 가랑잎도 손님이랍니다 많은 집에 초대를 해 봤지만 나는 문간에 서 있는 나를 하인(下人)처럼 정중하게 마중 나가는 것이다 안녕하세요 안으로 들어오십시오 그 무거운 머리는 이리 주.. 2011. 3. 2.
[문장] 혼자라는 것, 그리고 함께한다는 것 혼자라는 것, 그리고 함께한다는 것 프레이리 "나는 스스로를 고립시킴으로써 나 자신에 대해 더 잘 알게 된다. 그러면서 나의 한계를 인식하게 되고, 고립을 통해서는 이루어질 수 없는 영원한 탐색에 관여하고자 하는 욕구를 인식하게 된다. 세계가 나를 필요로 하듯 나에게는 세계가 필요하다. 고립은, 더불어 사는 삶을 거부하지 않고 그것을 자신의 존재의 계기로 확인할 때에야 비로소 의미를 갖게 된다." 『망고나무 그늘 아래서』에서 발췌 '함께하기 위한 고립' 내가 생각하는 '다가가기 위한 경계'와 일맥상통한다. 혼자 조용히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 그러고 나면 더 잘 더불어 있을 수 있을 것이다. 2007년 8월 오려뒀던 글. 연말에 조용히 혼자 생각할 시간을 가지게 되면서 떠오른 글. 다시, 프레이리의 함께.. 2010. 12. 30.
[시] 여름밤 - 이준관 여름밤 이준관 여름밤은 아름답구나. 여름밤은 뜬눈으로 지새우자. 아들아, 내가 이야기를 하마. 무릎 사이에 얼굴을 꼭 끼고 가까이 오라. 하늘의 저 많은 별들이 우리들을 그냥 잠들도록 놓아주지 않는구나. 나뭇잎에 진 한낮의 태양이 회중전등을 켜고 우리들의 추억을 깜짝깜짝 깨워놓는구나. 아들아, 세상에 대하여 궁금한 것이 많은 너는 밤새 물어라. 저 별들이 아름다운 대답이 되어줄 것이다. 아들아, 가까이 오라. 네 열 손가락에 달을 달아주마. 달이 시들면 손가락을 펴서 하늘가에 달을 뿌려라. 여름밤은 아름답구나. 짧은 여름밤이 다 가기 전에 (그래, 아름다운 것은 짧은 법!) 뜬눈으로 눈이 빨개지도록 아름다움을 보자. 친구야, 여름밤이 아름답다. 별들에게 밤새도록 물어보쟈 +_+. 2010. 6. 10.
[시] 혁명 - 송경동 혁명 송경동 나는 자꾸 뭔가를 잃어버렸다는 생각이 든다 오래 묵은 전화번호부를 뒤적거려봐도 진보단체 싸이트를 이리저리 뒤져봐도 나는 왠지 무언가 크게 잃어버린 느낌이다 그것이 무엇일까 공단 거리를 걸어봐도 촛불을 켜봐도, 전경들 방패 앞에 다시 서봐도 며칠째 배탈 설사인 아이의 뜨거운 머리를 만져봐도 밤새 토론을 하고 논쟁을 해봐도 나는 왜 자꾸 뭔가를 잃어버렸다는 생각이 들까 조용히 눈을 감아본다 분명히 내가 잃어버린 게 한 가지 있는 듯한데 그것이 무엇이었는지 잘 생각나지 않는다 송경동 시집, 『사소한 물음들에 답함』 中 이시영의 시를 처음 접했을 때 세상에 시보다 시같은 신문 기사 문구가 있을 수 있다는 걸 알았다. 송경동의 시를 접하니, 세상에 현실보다 더 현실같은, 신문기사보다 더 많은 진실을 .. 2010. 2.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