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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4

[시] 고요로의 초대 - 조정권 고요로의 초대 조정권 잔디는 그냥 밟고 마당으로 들어오세요 열쇠는 현관문 손잡이 위쪽 담쟁이넝쿨로 덮인 돌벽 틈새를 더듬어 보시구요 키를 꽂기 전 조그맣게 노크하셔야 합니다 적막이 옷매무새라도 고치고 마중 나올 수 있게 대접할 만한 건 없지만 벽난로 옆을 보면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은 장작이 보일 거예요 그 옆에는 낡았지만 아주 오래된 흔들의자 찬장에는 옛 그리그 문양 새겨진 그릇들 달빛과 모기와 먼지들이 소찬을 벌인 지도 오래되었답니다 방마다 문을, 커튼을, 창을 활짝 열어젖히고 쉬세요 쉬세요 쉬세요 이 집에서는 바람에 날려 온 가랑잎도 손님이랍니다 많은 집에 초대를 해 봤지만 나는 문간에 서 있는 나를 하인(下人)처럼 정중하게 마중 나가는 것이다 안녕하세요 안으로 들어오십시오 그 무거운 머리는 이리 주.. 2011. 3. 2.
[시] 혁명 - 송경동 혁명 송경동 나는 자꾸 뭔가를 잃어버렸다는 생각이 든다 오래 묵은 전화번호부를 뒤적거려봐도 진보단체 싸이트를 이리저리 뒤져봐도 나는 왠지 무언가 크게 잃어버린 느낌이다 그것이 무엇일까 공단 거리를 걸어봐도 촛불을 켜봐도, 전경들 방패 앞에 다시 서봐도 며칠째 배탈 설사인 아이의 뜨거운 머리를 만져봐도 밤새 토론을 하고 논쟁을 해봐도 나는 왜 자꾸 뭔가를 잃어버렸다는 생각이 들까 조용히 눈을 감아본다 분명히 내가 잃어버린 게 한 가지 있는 듯한데 그것이 무엇이었는지 잘 생각나지 않는다 송경동 시집, 『사소한 물음들에 답함』 中 이시영의 시를 처음 접했을 때 세상에 시보다 시같은 신문 기사 문구가 있을 수 있다는 걸 알았다. 송경동의 시를 접하니, 세상에 현실보다 더 현실같은, 신문기사보다 더 많은 진실을 .. 2010. 2. 1.
김혜순 시집, 『당신의 첫』 김혜순 시인의 '당신의 첫' 나는 '그냥' 샀다. 내가 못 읽으면 아빠 주지 뭐, 하며. 2006년 미당 문학상 수상작인 '모래여자'도 있었다. 모래여자 김혜순 모래 속에서 여자를 들어 올렸다 여자는 머리털 하나 상한 데가 없었다 여자는 그가 떠난 후 자지도 먹지도 않았다고 전해졌다 여자는 눈을 감고 있었지만 숨을 쉬지도 않았지만 죽지는 않았다 사람들이 와서 여자를 데려갔다 옷을 벗기고 소금물에 담그고 가랑이를 벌리고 머리털을 자르고 가슴을 열었다고 했다 여자의 그가 전장에서 죽고 나라마저 멀리멀리 떠나버렸다고 했건만 여자는 목숨을 삼킨 채 세상에다 제 숨을 풀어놓진 않았다 몸속으로 칼날이 들락거려도 감은 눈 뜨지 않았다 사람들은 여자를 다시 꿰매 유리관 속에 뉘었다 기다리는 그는 오지 않고 사방에서 손.. 2008. 5. 1.
[시] 박찬 유고 시집, 『외로운 식량』 외로운 식량 이슬만 먹고 산다 하데요 꿈만 먹고 산다 하데요 그러나 그는 밥을 먹고 살지요 때로는 술로 살아가지요 외로움을 먹고 살기도 하지요 외로움은 그의 식량, 사실은 외로움만 먹고 살아가지요 외로움은 그의 식량이지요 그리운 잠 2 서산에 넘어가는 해를 바라보는 일은 쓸슬하다 하루 일을 마치고 일터를 나서는 일은 쓸쓸하다 뒤늦게 떠오르는 하현달을 보는 일은 쓸쓸하다 먼 산을, 먼 하늘을 응시하는 눈이 참 슬쓸하다 길게 그림자 드리워지는 뒷모습이 참 쓸쓸하다 그런 모습들을 바라보는 일이 참으로 쓸쓸하다 쓸쓸한 발걸음의 끝에 오는 잠이여 편안하여라 쓸쓸한 시선의 끝에 쏟아지는 잠아 편안하여라 오십줄 이러다 합죽이가 되겠다. 지난 세월 너무 옹다물고 살다보니 어금니에서부터 하나씩 뽑아낸 것이 이제는 오물거.. 2008. 4. 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