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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기의 즐거움/조금 긴 소개

『9월의 4분의 1』지금까지 읽은 일본 소설 중에...

by LoveWish 2009. 7. 26.

오사키 요시오의 『9월의 4분의 1』

일본 소설을 그렇게 많이 읽은 편은 아니지만, 지금까지 읽었던 일본 소설 중에 최고로 손에 꼽게 될 것 같다. △보상받지 못한 엘리시오를 위해, △켄싱턴에 바치는 꽃다발, △슬퍼서 날개도 없어서, △9월의 4분의 1. 이렇게 총 네 편으로 구성된 소설집이다. 이게 그러니까 단순한 러브 스토리가 다가 아니더란 말이지.

'보상받지 못한 엘리시오를 위해'

대학 체스 동아리 회원인 야마모토, 요리코, 다케이의 이야기. 야마모토는 겉보기에 출세 가도를 정석으로 밟아가는 요리코나 다케이와는 달리 누가 봐도 비생산적인 '체스' 그 자체에 몰두했다. 그런 야마모토가 난 좋았다. ↓

중학교와 고등학교가 상급 학교에 진학하기 위한 코스라고 한다면 대학은 장소 그 자체에 목적을 두고 싶다는 것이 내 생각이었다. 사회에 진출하는 과정으로서가 아닌, '어떤 무언가'를 찾고, 그리고 거기에 깊이 파고들어 그 '무언가'를 제대로 연구하는 장소로 삼고 싶었다. 다만 그 무언가가 우연히 체스라는, 학생에게 있어서 아무 쓸모없는 것이 되었을 뿐이다. p.18

"생각한다는 작업의 구체화?"
"그래. 지금은 그렇게밖에는 잘 설명할 수 없지만, 나는 그것으로 족해. 대학시절에는 뭔가 비생산적인 일에 몰두하고 싶었고, 지금이 아니면 그것을 할 수 없지. 그래서 나는 그런 만남을 가질 수 있게 해준 너에게 언제나 감사하고 있어. 이래 봬도 말이지." p.26


'켄싱턴에 바치는 꽃다발'

10년 간 편집장으로 근무한 잡지사를 떠나며 삶의 의미를 묻는 유이치와 그의 연인 미나코. 영국으로 떠나간 유이치는 요시다 소하치와 제인의 이야기를 들으며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

나는 도대체 무얼 하고 있는 건가? 회사를 그만두는 문제라든지, 지금까지 자신을 따라다니는 막연한 불안이라든지, 그런 자기 자신의 일만 생각하고 미나코의 일은 완전히 무시하고 있지 않았는가.
 
미나코가 불안해하는 것은 내가 회사를 그만두었기 때문도, 저축이 없기 때문도, 앞으로의 계획이 흔들리기 때문도 아니다. 침묵 속으로 돌아갈 결심을 내가 그녀에게 미리 고백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요시다 소하치가 이송되던 차 안에서, 제인에게 외쳤던 것 같은 강하고 분명한 말을 나는 단 한번이라도 미나코에게 고백한 적이 있었던가? 8년이나 되는 시간, 나의 연인으로써 살아온 미나코에게, 단 한번이라도 감사 의 마음을 정확하게 전달한 적이 있었던가? p.107

'슬퍼서 날개가 없어서'

레드제플린을 추종해 고등학교때부터 밴드를 하던 마츠자키와 음악에 타고난 재능을 뽐내던 마미의 이야기. 마츠자키는 대학교를 진학하면서 도쿄로 가게되는데, 도쿄에 적응하는 마츠자키의 모습에서 나의 1학년 때가 떠올랐다. ↓

하숙집을 찾고, 수업에 나가기 시작하고, 록 서클을 찾고, 몇 번인가의 환영 미팅에 참가하는 등, 나는 신입생답게 정신없이 돌아다녔다. 그러나 어디를 가서 무엇을 해도 하네다에 내린 순간의 악취가 달라붙어서 떨어지질 않았다. 때로는 희미해졌다가, 때로는 더욱 지독해지는 냄새에 둘러싸여, 그래도 나는 어떻게든 이 대도시에 섞이려고 나름대로 필사적이었다.

잔뜩 지쳐서 방으로 돌아오면 나무토막처럼 쓰러져 잠이 들었다. 도무지 환기가 불가능한 공기와 폐쇄된 하늘, 발 디딜 틈 없이 붐비는 사람들, 그리고 도시가 지닌 끝없는 욕망의 힘. 나는 그 엄청난 것들을 피부로 느끼며 피곤에 절어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p. 136

대학교 1학년의 가을을 맞이할 즈음, 불과 반년 만에 나는 도쿄의 냄새를 느끼지 못하게 되어 있었다. 그렇게나 놀라워하고 볼 때마다 속이 거북했던 사람들을 행렬, 그 속의 한사람이 되어가는 자신을 어느 사이엔가 받아들이고 있었다. p. 140


'9월의 4분의 1'

작가가 되기 위한 준비를 했으나 글을 쓸 수 없었던 켄지에게 브뤼셀에서 만난 나오가 전해준 희망의 메시지. 켄지는 글이 써지지 않자, 잠시 글 쓰는 것을 포기하고 밥솥을 팔다가 우연히 잡지에서 본 브뤼셀의 그랑 플라스 사진이 마음에서 떠나지 않아 그 곳으로 훌쩍 간 것이다. '그랑 플라스' 2007년 유럽 여행 때 갔던 그랑 플라스 풍경이 선명하게 떠오르면서 소설에 더 감정이 이입되고 있었다. 내가 갔던 날도 켄지와 나오가 만나던 날처럼 비가 내리고 있었는데 말이지. ↓


유스호스텔은 벽돌로 지어진 조용하고 아담한 건물이었다. 운 좋게도 깨끗하고 조용한 1인실이 남아 있었다. 나는 깨끗하게 빨아 풀을 먹인 시트가 깔린 침대에 드러누웠다. 그리고 곧 깊이 잠들었따.

문득 눈을 떴을 때, 나는 내가 어디에 있는지 잠깐 분간할 수 없었다. 마치 깊은 어둠 속에서 엉덩이를 걷어차여 갑자기 빛 속으로 내쫓긴 듯한 기분이었다.


짧은 시간이긴 했지만 내가 일본이 아닌 브뤼셀에 있다는 것을 인식할 때까지의 불안감은 꽤나 컸다.  p. 191

처음 그랑 플라스에 도착한 켄지는 큰 감격을 받지 못했으나 새벽 3시에 혼자 광장에 드러누워 내리는 비를 온 몸으로 맞는다. 실제로 유럽의 많은 장소들이 붐비는 관광객들 때문에 온전히 그 곳을 느끼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나도 처음 그랑 플라스에 당도했을 때 비 내리는 조용한 광장의 이미지 밖에 갖지 못했는데, 9월의 4분의 1은 읽은 지금은 내가 찍은 이 사진만으로도 더 크게 느껴진다.



각 소설에서 내가 마음에 드는 부분만 간단히 발췌해 적은 소개글이므로, '그들'사이에 있었던 이야기들이 던져 주는 생각해볼 거리들은 직접 느껴보시길 바란다. 나도 가을에 다시 읽어봐야겠다. 여행도 가고 싶다. ㅜ_ㅜ



가을에 어울릴 것 같은 책이긴 하지만, 비내리는 여름 밤에도 딱일 것 같은데!
어떠세요? ^^ 9월의 4분의 1. 게다가 가격도 착하다는. ↓

9월의 4분의 1 - 10점
오사키 요시오 지음, 우은명 옮김/황매(푸른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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