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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의 즐거움/오려두는 글

[시] 칼과 칸나꽃

by LoveWish 2008. 2. 23.
칼과 칸나꽃
최정례

너는 칼자루를 쥐었고
그래 나는 재빨리 목을 들이민다
칼자루를 쥔 것은 내가 아닌 너이므로
휘두르는 칼날을 바라봐야 하는 것은
네가 아닌 나이므로

너와 나 이야기의 끝장에 마침
막 지고 있는 칸나꽃이 있다

문을 걸어 잠그고
슬퍼하자 실컷
첫날은 슬프고
둘째 날도 슬프고
셋째 날 또한 슬플 테지만
슬픔의 첫째 날이 슬픔의 둘째 날에게 가 무너지고
슬픔의 둘째 날이 슬픔의 셋째 날에게 가 무너지고
슬픔의 셋째 날이 다시 쓰러지는 걸
슬픔의 넷째 날이 되어 바라보자

상갓집의 국숫발은 불어터지고
화투장의 사슴은 뛴다
울던 사람은 통곡을 멈추고
국숫발을 빤다

오래 가지 못하는 슬픔을 위하여
까지 쓰러지자
슬픔이 칸나꽃에게로 가
무너지는 걸 바라보자


저항할 수 없는 칼자루 앞에 그냥 몸이 맡겨졌다.
그리고 난 그 장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슬퍼할 수 있는 만큼 슬퍼했다.
첫째 날도 슬펐고 둘째 날도 슬펐고 셋째 날도 슬펐고
지금도 슬프지만 분명
첫째 날은 둘째 날에게 둘째 날은 셋째 날에게 무너졌다.
셋째 날이 넷째 날에게 무너지지 않을 수도 있지만,
넷째 날은 다시 다섯째 날에게 무너질 것이다.

울었더니 배가 고파서 결국 울음을 멈추고 국숫발을 빨았더랬다.
그러고 보니 정말 그날 해물칼국수를 먹었다.
밥알이 모래알 같던 엄마에게 국숫발은 썩 괜찮았다.

슬픔은 그리 오래가지 못할거야, 그러니 끝까지 쓰러져야겠어.
칸나꽃이 되어야겠다.
슬픔이 칸나꽃에게로 가 무너질 것이라고 하니.

2007년 5월 24일 작성.

+
지금까지 내 인생에 가장 큰 고비가 놀랄 시간도 없이 지나갔던 5월.
저 시 한 편이 그렇게 위안이 될 수 없었다.
그래서 독서치료에서도 시치료가 큰 부분을 차지하나보다.
지금 읽어도 눈물 날 것 같다.
그 때 실컷 슬퍼한다고 했는데도, 아직도 찌끄러기가 남아 있다.
그래서 문득 문득 슬프다.
그래도 그 슬픔이 첫째 날 만 못하니, 난 건강하다.
그리고 그 슬픔으로 인해 느낄 수 있었던 다른 기쁨들 또한 무척 컸다.
그래서 앞으로도 더 많이 기쁠거다.
꼭, 그럴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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