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업 시간에 책을 읽고(책은 원래 같은 제목의 단행본 소설집으로 예전에 나온 것이 있고, 영화 밀양이 개봉하면서 새로 나온 벌레 이야기만 얇게 새로 나와 있습니다.) 영화의 내용을 상기시키면서 관련 논문도 여러 편 찾아보고 참고해서 원작 소설과 영화를 비교분석해서 글을 썼습니다. 발표도 했었는데, 괜찮은 평가를 받았습니다. 당시에 발표했던 내용을 포스팅 합니다.
구원은 어디에 있을까라는 내용으로 소설 ‘벌레 이야기’와 영화 ‘밀양’에 대한 비평을 해보려 합니다. 먼저 벌레 이야기와 밀양의 배경을 살펴보겠습니다. 벌레 이야기는 작가가 서문에서도 밝혔듯이, 아이를 살해한 유괴범이 사형 직전 하나님에 품에 안겨 평화롭게 떠난다는 이야기를 한 것을 듣고 충격을 받아 실제 사건을 바탕으로 쓴 소설입니다. 이창동 감독의 영화 밀양은 벌레이야기를 바탕으로 하고 있으나, 아이의 유괴와 엄마의 고통과 좌절이라는 착상을 빌되, 인물과 배경을 완전히 새롭게 한 작품입니다.
이러한 두 작품에 대해, 서사구조의 공통점과 차이점, 그리고 주제 등의 측면에서 분석을 해 보았습니다. 먼저 두 작품의 공통된 줄거리와 다른 결말은 모두 알고 계실테니 자세한 언급은 넘어 가도록 하겠습니다. 다만, 소설과 영화의 드러난 차이점을 살펴보면 먼저 ‘벌레 이야기’는 남편의 관찰에 의한 서술 시점을 이루고 있으나, ‘밀양’은 서술자가 따로 없는 극의 형태를 띠고 있음을 알 수 있고, 또한 ‘벌레 이야기’는 공간적 배경이 특별히 드러나 있지 않지만, ‘밀양’은 ‘비밀의 볕’이라는 한자어의 의미를 가지기도 한 실제 지명 이름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벌레 이야기’는 늦둥이 외아들은 둔 50대 중년의 부부가 이야기의 중심이라면, ‘밀양’은 30대 초반의 미망인과 그를 도와주는 노총각이 중심이 됩니다. 또한 유괴를 당한 아이가 ‘벌레 이야기’에서는 초등학교 4학년의 장애를 가진 아이지만, ‘밀양’에서는 유치원에 다니는 7살 정도의 아이라는 점, 아이가 다니는 학원 또한 주산학원과 웅변학원이라는 차이를 보인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소설 ‘벌레 이야기’가 김집사와 아내 사이의 본격적인 논쟁을 중심으로 한다면, 영화 ‘밀양’은 불행의 시간을 겪어나가는 신애를 종찬이 따뜻하게 살펴주는 사랑이야기로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벌레이야기는 서술자인 남편이 아내의 이야기를 과거의 시간에 대한 재배치와 나열을 통해 주제를 표현하고 있는 반면, 영화 밀양에서는 밀양이라는 공간을 통해 주제를 보여줍니다. 그렇다면 두 작품에서 ‘밀양’과 ‘벌레’가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요.
밀양은 지방의 작은 도시의 이름으로 비밀의 볕이라는 해석이 가능합니다. 영어 제목 Secret sunshine도 은밀한 햇살, 숨은 빛 정도로 해석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영화 밀양의 영상에서도 알 수 있듯이 ‘빛’은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남편을 잃고 남편의 고향에서 새로운 삶의 시작하려고 밀양으로 가는 장면에서도 빛이 들어오고, 마지막 장면도 마당에 빛이 들어오는 장면으로 끝이 납니다. 영화 밀양에서 빛은 그 의미가 계속 변화하긴 하지만, 결국 빛이 주인공이 찾아나가야 할 희망을 품고 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소설 벌레 이야기에서 벌레는 작가가 서문에서 밝혔듯이 존엄성이 짓밟힌 인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벌레는 아내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고, 또한 벌레는 신 앞에서 유한한 존재인 인간들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를 통해 주제를 유추해볼 수 있습니다. 소설 ‘벌레 이야기가’가 신앙 속 인간감정의 소외를 다루면서 이를 자살이라는 절망적인 모습으로 그려낸다면, 밀양은 다시 햇살을 비추며 종찬의 사랑과 함께 좀 더 구원과 희망이라는 주제에 집중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구원은 가능한 것인지, 가능하다면 구원은 어디에 있는 것인지, 진정한 구원은 어디로부터 오는 것인지에 대한 논의를 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야기에서 주인공은 아이를 죽인 사람을 용서하기로 마음먹고 교도소를 찾아갔다가 절망하고 돌아옵니다. 그 절망의 원인은 다음과 같은 대목에서 드러나는데요, ‘나는 새삼스레 그를 용서할 수도 없었고, 그럴 필요도 없었어요. 하지만 나보다 누가 먼저 용서합니까. 내가 그를 아직 용서하지 않았는데 어느 누가 나 먼저 그를 용서하느냔 말이에요. 그의 죄가 나밖에 누구에게서 먼저 용서될 수 있어요? 그럴 권리는 주님에게도 있을 수가 없어요. 그런데 주님께선 내게서 그걸 빼앗아가버리신 거예요. 나는 주님에게 그를 용서할 기회마저 빼앗기고 만 거란 말이에요. 내가 어떻게 다시 그를 용서합니까.’라고 말합니다.
이렇듯 주인공은 그동안 의지해왔던 신으로부터 용서의 기회를 빼앗기고, 신 앞에서 절망합니다. 하나님은 결국 그녀를 구원하지 못했고, 소설에서 그녀는 자살을 택합니다.
김집사는 그런 그녀 앞에서 끝까지 하나님의 살인범에 대한 구원을 옹호해야만 했을까요? 김집사에게서 볼 수 있었듯이 전도의 방식이 너무 교조적이고 원론적이기만 했습니다. 김집사처럼 교조적으로 설교하고 용서와 구원을 강요하는 것이 과연 주인공에게 얼마나 도움이 얼마나 도움이 되었을까 생각해봅니다. 김집사의 설득으로 하느님을 만나려 노력했지만, 배신당할 수 밖에 없었던 주인공의 마음이 오죽했을까싶습니다.
그렇다면 진정 구원은 없는것일까요? 주인공은 소설과 영화 모두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를 빼앗기고 구원받지 못하지만, 결과적으로 소설에서 그런 그녀가 자살을 택한 반면, 영화에서 그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 나갑니다. 그래서, 영화 속에서 구원의 빛을 찾아 보았습니다.
영화 밀양의 감독 이창동은 한 인터뷰에서 “인생의 희망이나 구원이란 것은 바로 우리가 밟고 있는 이 땅에서부터 찾는 것이 아닌가. 멀리 저 하늘이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에 구원이나 소망이 있는 것 아닌가 그런 의미다.”라고 말했습니다. 이러한 이야기의 의미는 영화 ‘밀양’의 마지막 장면에서 정신병원에서 퇴원한 신애가 마당에서 머리를 자를 때 땅을 비추는 장면으로 영화가 끝나는 것을 보면서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구원이 하늘이 아닌 땅에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구원이 신이 아닌 사람으로부터 가능하다는 것을 말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영화 ‘밀양’에서 신애를 구원하는 사람은 누구 입니까, 바로 종찬입니다. 종찬이란 인물은 신의 영역과 싸우는 신애라는 인물과 대조를 이루는 세속적 인물이지만, 이러한 세속성이 결국은 끝까지 신애를 지켜준다는 점에서 원작과는 다른 접근을 시도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주인공은 불행이 닥쳐왔을 때 신에 대한 믿음과 신앙을 가졌지만, 그것은 오히려 더 큰 상처를 남긴 반면, 그녀가 무시하고 외면했던 세속적인 인물 종찬은 그런 그녀를 마지막까지 버리지 않고 구원의 손길을 내민 것입니다.
다시 한 번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불행이 닥쳐왔을 때, 교조적이고 원론적인 김집사 같은 인물 혹은 오히려 배신감을 안겨줬던 신의 존재의 필요가 먼저인가, 아니면 종찬 같은 주변의 따뜻한 손길이 필요한가에 대해서 말입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소설과 영화의 내용으로부터 봤을 때 진정한 구원은 ‘벌레들’이 사는 동네인 ‘밀양’이라는 땅 안에 함께 있는 사람들로부터 가능한 것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참고문헌
* 전지은, 「이청준 소설의 매체 변용양상 연구 : 『서편제』, 『축제』, 『벌레 이야기』를 중심으로」, 고려대 국문과 석사학위 논문, 2008.
* 김석희, 「소설 <벌레 이야기>와 영화 <밀양> 사이」, 『문학치료연구』, vol. 7, 2007
밀양 - 이청준 지음, 최규석 그림/열림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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