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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기의 즐거움/조금 긴 소개

『김예슬 선언』과 『컨설턴트』

by LoveWish 2010. 5. 8.
왜 '김예슬 선언'이랑 소설인 '컨설턴트'를 함께 포스팅하는 지 의아할 것이다. 지난 4월 말, '김예슬 선언'을 읽다 말고, 5월 초 '컨설턴트'를 읽고 다시 '김예슬 선언'을 마저 읽었다. '김예슬 선언' 앞에서 난 소설 '컨설턴트' 속 주인공이었다. 그 이야기를 해보련다. 


▶ 프롤로그


김예슬이라는 사람이 고려대학교에 다니다가 자퇴를 한 건 이미 알고 있었다.
그 이야기가 여러 매체에 보도되고, 책까지 나온 것도 알고 있었다. 
책을 사보긴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다 잠시 잊고 있었다.

그러다 며칠 전, 한겨레에서 홍세화 칼럼을 읽고 책을 바로 주문했다.

전략
한편, <인권연대> 소식지 최근호에는 이 일을 지켜본 어느 지방대생의 '좌절'의 변이 실렸다. 만약 지방대에서 "똑같은 일이 벌어진다면 박수는커녕 눈길이라도 받았을까?"라고 질문을 던진 그는 "세상은 어느 한 대학생이 대학으로 대표되는 한국 교육에서 의미를 찾지 못하고 자퇴했다는 것보다 '고대생'이 그랬다는 것에 더 큰 관심이 있는 듯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대학을 스스로 거부한 그를 마지막까지 빛나게 한 건 명문대 이름이었을지도 모른다"고 썼다.

후략

손에 쥔 책은, 작고 가벼웠으나 분명했다. 

<김예슬 대학 거부 선언>전문이 나오고, '글을 시작하며'라고 서문이 나온다. 
선언을 읽고, 서문을 읽다 그만, 나도 모르게 눈물이 뚝뚝 떨어진다.

86년에 태어나, 2004년에 학교에 들어와... 25살 지금, 학교를 그만둔 거네. 

학비 마련을 위해 고된 노동을 하고 계신 부모님이 눈앞을 가리는데도 '죄송합니다. 이 때를 잃어버리면 평생 나를 찾지 못하고 살 것만 같습니다.'라고 그만둔 거네.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충격으로 슬퍼하고 있을 어머니, 아버지, 가족들을 삶의 거울로 비춰보며 살아가겠다며... 

학교를 그만두기 전 한 시간, 피켓을 들고 1인 시위를 한 건, 강해서가 아니라 약해서. 조용히 그만둘 수도 있겠지만, 너무나 약하고 못나서,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고려대 학생의 자격증을 스스로 던져버린 게 비겁할까봐, 언젠가 혹시라도 다시 받아달라고 그 문을 들어설까봐... 

그랬다는거네.

한편, 86년에 태어나, 2004년에 학교에 들어온... 25살 지금 나는, 비슷한 문제의식을 느끼고 고민을 했음에도, 대학원생이 되어 있다. 용기가 없었다. 끝이 없는 트랙을 달려가야 하는 대학생으로 살아가는 시대 상황이 만족스럽지 않았고 그것을 따라갈 자신도 없었지만, 그것을 내던질 용기는 더더욱 없었다. 부끄럽고 부끄럽고 부끄러워서 눈물이 났다. 


▶ '김예슬 선언' 그리고 나는,


토익, 자격증, 봉사활동, 학점, 어학연수... 똑같이 잘할 자신도 그러나 그것을 내던질 용기도 없었던 나는, 그저 주어진 테두리 안에서 불안해하는 것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끊임없이 불안했기에 그런 날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범위의 것을 해야 했다. 내가 할 수 있었던 것 중 가장 큰 부분을 차지했던 게 책읽기였다는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었을까. 아니면 내가 하는 전공이 내 생각들을 배반하지 않는다는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었을까. 

'졸업을 앞둔 88만원 세대의 불안(http://lovewish.tistory.com/127)'이라는 글도 썼었지만, 고민 끝에 어쨌든 나는 지금 대학원에 다니고 있다. 그런데 김예슬을 읽고 다시 한 번 고민한다. 여전히 용기없는 채로 부끄럽기만 하고 말 텐가, 아니면 그녀를 지지함과 동시에 나역시 내 선택을 지지하고 부끄럽지 않기 위해 노력할 것인가. 김예슬도 이렇게 말한다. "나는 작은 돌멩이 하나가 되어 조용히 외치고 싶었다. 이것은 나 하나의 문제가 아니기에. 누군가는 어딘가에서 다른 방식으로 작은 돌멩이의 외침을 멈추지 않고 있기에."(p.17) 

그리고 김예슬은 신선하다. '우리는 충분히 래디컬한가'(p.68)에서 진보적이라는 지식인들과 언론이 대응하는 방식과 차원에서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다며, 그동안 그들과 '비슷하다'고 생각해온 자신이 전혀 다른 꿈을 꾸고 있었던 것처럼 느껴졌다고 한다. 대학 시절에도 학생운동 하는 선배들과 여러 단체 분들을 존중하고 지지를 보내면서도 도저히 함께 할 마음이 나지 않아 송구스러웠다고 한다. 나 역시 어느 정도 공감하는 부분이다. 또 '88만원 세대라 부르지 마라'(p.80)에서는 이런 문장도 인용된다. "보수는 괴로워하지 않고 아이를 경쟁에 밀어 넣고, 진보는 괴로워하면서 아이를 경쟁에 밀어 넣는다", "보수는 아이가 명문대생이기를 바라고, 진보는 아이가 의식 있는 명문대생이기를 바란다" 이 부분에 있어서는 여러 견해가 있겠지만, 어쨌든 진보의 스펙트럼 역시 넓게 퍼져야 하는 건 분명하니까 이것 또한 신선하게 다가온다. 


▶ '컨설턴트'

첫 문단에서 언급한 '컨설턴트'로 돌아가 보자. 컨설턴트에는 '죽음을 의뢰하는 사회'에서 '죽음을 서비스하는 사람'으로 살아가는 주인공이 나온다. 주인공은 자신의 상황과 직업을 고민해 보기도 하지만, 결국 상당한 논리로 '합리화'하고, 자신은 '평범한' 구성원일 뿐이라고 한다. 
  

이야기의 전개에 있어서도 중후반부에서 주인공이 어떤 사건 때문에 자신의 상황에 대한 심각한 회의가 오지만 또 다시 합리화 끝에 생활을 이어나가게 되는 과정이 중요하게 나온다. 큰 틀에서 보면 소설의 내용이 주인공의 합리화 과정이지만 결국, 그것을 상세하게 기록해 폭로한다는 점에서 그 상황에 저항하는 것으로도 보인다. 실제로 이 이야기가 '회사'에 발각되면 어찌 될지 모름을 우려하는 내용이 나오기도 한다. 

어쨌든 나는 '컨설턴트'를 읽는 동안 '김예슬 선언'이 계속 떠올랐다. '어쩔 수 없었다, 정말 어쩔 수 없었다'는 '컨설턴트'의 주인공 모습과 내 모습이 오버랩되면서 말이다. 그러나 소설의 구조에서처럼, 나 또한 이렇게 나를 폭로함으로써 저항한다. 


그녀의 의지가 담겨 있는 거의 마지막 페이지의 글(p.117)



▶ 에필로그

특정 책을 잘 권하지 못하는 편이지만, '김예슬 선언'만큼은 대학생 후배들이 꼭 한 번 읽어줬으면 좋겠다. 같은 길을 가더라도 멋모르고 남들 다 가는 길을 따라가는것과 한 번쯤 절실하게 고민해보고 가는 것은 분명히 다르니까.

+ 텅 빈 기표가 된 '김예슬 선언' (http://www.sisainlive.com/news/articleView.html?idxno=7281)을 링크해 둔다. 김예슬에 공감하지만, 일정 부분 이러한 비판도 피할 수 없으리라. 그리하여 더 성장할 수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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