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15 [시] 고요로의 초대 - 조정권 고요로의 초대 조정권 잔디는 그냥 밟고 마당으로 들어오세요 열쇠는 현관문 손잡이 위쪽 담쟁이넝쿨로 덮인 돌벽 틈새를 더듬어 보시구요 키를 꽂기 전 조그맣게 노크하셔야 합니다 적막이 옷매무새라도 고치고 마중 나올 수 있게 대접할 만한 건 없지만 벽난로 옆을 보면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은 장작이 보일 거예요 그 옆에는 낡았지만 아주 오래된 흔들의자 찬장에는 옛 그리그 문양 새겨진 그릇들 달빛과 모기와 먼지들이 소찬을 벌인 지도 오래되었답니다 방마다 문을, 커튼을, 창을 활짝 열어젖히고 쉬세요 쉬세요 쉬세요 이 집에서는 바람에 날려 온 가랑잎도 손님이랍니다 많은 집에 초대를 해 봤지만 나는 문간에 서 있는 나를 하인(下人)처럼 정중하게 마중 나가는 것이다 안녕하세요 안으로 들어오십시오 그 무거운 머리는 이리 주.. 2011. 3. 2. [시] 여름밤 - 이준관 여름밤 이준관 여름밤은 아름답구나. 여름밤은 뜬눈으로 지새우자. 아들아, 내가 이야기를 하마. 무릎 사이에 얼굴을 꼭 끼고 가까이 오라. 하늘의 저 많은 별들이 우리들을 그냥 잠들도록 놓아주지 않는구나. 나뭇잎에 진 한낮의 태양이 회중전등을 켜고 우리들의 추억을 깜짝깜짝 깨워놓는구나. 아들아, 세상에 대하여 궁금한 것이 많은 너는 밤새 물어라. 저 별들이 아름다운 대답이 되어줄 것이다. 아들아, 가까이 오라. 네 열 손가락에 달을 달아주마. 달이 시들면 손가락을 펴서 하늘가에 달을 뿌려라. 여름밤은 아름답구나. 짧은 여름밤이 다 가기 전에 (그래, 아름다운 것은 짧은 법!) 뜬눈으로 눈이 빨개지도록 아름다움을 보자. 친구야, 여름밤이 아름답다. 별들에게 밤새도록 물어보쟈 +_+. 2010. 6. 10. [시] 혁명 - 송경동 혁명 송경동 나는 자꾸 뭔가를 잃어버렸다는 생각이 든다 오래 묵은 전화번호부를 뒤적거려봐도 진보단체 싸이트를 이리저리 뒤져봐도 나는 왠지 무언가 크게 잃어버린 느낌이다 그것이 무엇일까 공단 거리를 걸어봐도 촛불을 켜봐도, 전경들 방패 앞에 다시 서봐도 며칠째 배탈 설사인 아이의 뜨거운 머리를 만져봐도 밤새 토론을 하고 논쟁을 해봐도 나는 왜 자꾸 뭔가를 잃어버렸다는 생각이 들까 조용히 눈을 감아본다 분명히 내가 잃어버린 게 한 가지 있는 듯한데 그것이 무엇이었는지 잘 생각나지 않는다 송경동 시집, 『사소한 물음들에 답함』 中 이시영의 시를 처음 접했을 때 세상에 시보다 시같은 신문 기사 문구가 있을 수 있다는 걸 알았다. 송경동의 시를 접하니, 세상에 현실보다 더 현실같은, 신문기사보다 더 많은 진실을 .. 2010. 2. 1. [시] 지하철에 눈이 내린다 지하철에 눈이 내린다 윤제림 강을 건너느라 지하철이 지상으로 올라섰을 때 말없이 앉아 있던 아줌마 하나가 동행의 옆구리를 찌르며 말한다 눈 온다 옆자리의 노인이 반쯤 감은 눈으로 앉아 있던 손자를 흔들며 손가락 마디 하나가 없는 손으로 차창 밖을 가리킨다 눈 온다 시무룩한 표정으로 서 있던 젊은 남녀가 얼굴을 마주 본다 눈 온다 만화책을 읽고 앉았던 빨간 머리 계집애가 재빨리 핸드폰을 꺼내든다 눈 온다 한강에 눈이 내린다. 지하철에 눈이 내린다. 지하철이 가끔씩 지상으로 올라서주는 것은 고마운 일이다. 내리는 눈을 발견했을 때의 따뜻한 행복감이 시에서 느껴진다. 나도, '눈 온다'라고 행복을 나누는 말 한 마디를 하고싶다. 눈 내리는 날 한강을 건너는 지하철을 타는 것도 괜찮겠구나. 2007년 겨울인 듯.. 2009. 11. 17. 이전 1 2 3 4 다음